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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식 수술 후 자살한 여의사 사건의 진실

감자만두 2017. 3. 1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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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PD수첩에 방영된 여의사 지현경씨 자살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유가족이 직접 쓴 글입니다.

라식을 수술하는 의사들의 자세와,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도박이란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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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님이 작성한글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라식수술 후 부작용으로 비관자살한 여의사의 언니입니다.(사촌언니의 아이디를 빌려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동생의 죽음에 여러 말들이 있어왔으나 사실에 대한 내용을 모르고 계신 것 같아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글을 올리게 되었으니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일도 많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사건사고가 일어나지만 아직 세상은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많고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진다는 믿음으로 억울하고 분한 우리 유가족들의 심정을 이렇게 글로나마 올리니 헤아려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006년 1월 28일 그 날도 저는 서울에서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쉬고 있었는데(제가 간호사라 밤 근무를 하고 집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낮 3시 50분 경 부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화의 내용은, 제 사랑하는 막내 동생이 수술 후유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를 비관하고 낮 1시쯤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의 신생아실에서 독한 제초제를 먹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그라목손이라는 제초제 이름이 생각났고, 그것을 먹은 사람은 100% 사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먹고 죽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게 죽는다는 것을 임상경험상 알고 있었기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으로 통곡했습니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 광주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힘없이 누워 있는 동생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체구의 제 동생은 위세척과 혈액투석을 마치고 힘없이 누워있다 볼에 뽀뽀하는 언니를 발견하고는 작은 미소를 흘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실신상태였고 둘째 동생도 넋이 나간 상태로 우리 가족은 그렇게 설을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한 달 전 동생이 라식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1월 24일 광주에 와서 가족을 만나고 서울로 올라간 상태였기에 막내 동생이 약을 먹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교육공무원으로 40년을 교직에 몸담으시고 정년퇴직하신 아버지와 평범하지만 인자하시고 자식을 위해 살아오신 어머니, 그리고 저와 동생 둘의 3녀로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비록 아들이 없는 장손집안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구김살 없이 자란 우리 3녀를 큰 자랑으로 생각하시며 평생을 사신 분들입니다. 특히 막내 동생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번 사고로 죽을 때까지 아니 현재까지도 똑똑하고 든든한 우리 집의 아들이자 기둥이었습니다. 학교 때도 우등생이었고, 그 힘들다는 의대에 당당히 합격해서 매번 장학금을 받고 다녔으며 유급 한번 당하지 않고 6년의 의대공부를 마치고 ㅇㅇ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레지던트 2년차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선후배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밝고 붙임성이 좋아 모르는 사람과도 금방 친해지는 명랑한 성격이었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올 2월 24일에 졸업식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대학원 공부하면서 대출받았던 대출금 5백만원도 1월을 마지막으로 본인이 전부 갚았고, 일 년 동안 모은 적금통장이 2월 만기로 1천 2백만 원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왜 그렇게 인기 많고, 성실한 동생이 이런 슬프고 힘든 죽음을 택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약 기운이 동생을 앗아가기 전, 우리는 조심스레 동생에게 자살을 택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죽어가는 동생에게 자살의 이유를 묻는 것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었지만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동생은 앞이 보이지 않게 되어 그랬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동생은 평소에도 안구 건조증이 심해서 렌즈를 끼지 못했습니다. 소프트렌즈, 하드렌즈 다 끼어 보았지만 불편해서 끼지 못했습니다. 안경 쓰는 것을 불편해하던 동생은 1년 전부터 라식을 고려하고 있었고, 좋은 병원과 의사를 수소문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과 교수님의 소개로 모 안과의 조 모 원장을 만나게 되고, 라식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12월 10일, 라식에 필요한 모든 검사를 하러 병원에 갔을 때 조 모 원장은 동생의 눈이 라식수술하기에 아주 적합한 눈이라고 하면서 1개월만 있으면 아무 부작용 없이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수술 당일 병원에 함께 가셨고, 수술 후에는 빛 번짐(halo) 현상이 조금 있을 수 있지만 금방 없어질 것이고, 아주 좋아질거란 설명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의 교수님의 소개로 만나게 된 조 모 원장과의 수술 전 만남은 일종의 믿음과 신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조 모 원장은 만약에 있을 수 있는 수술 이후의 후유증에 관한 설명을 해 주기는 커녕 수술 후의 장밋빛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환자에게 기대감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 동안 눈 때문에 불편했던 동생에게 수술로 정상인의 생활을 할 수 있음을 강하게 심어주어 수술을 유도한 것입니다. 만약 수술 후 안구건조증이 심해질 수 있다거나 경우에 따라서 2~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밤에 야간 운전이 어렵거나 빛 번짐 현상이 오래 갈 수 있을 거란 얘기만 해줬더라도 막내 동생은 그리 쉽게 라식수술을 결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 모 원장은 자신의 수술 경험을 강조하며 동생의 눈은 부작용 없는 수술 결과가 나올 것이라 강조한 것입니다. 결국 동생은 조 모 원장을 믿고 12월 24일 라식수술을 하게 됩니다.
의사인데 수술 부작용이나 후유증에 관해 몰랐는지 의아해 하시겠지만 안과는 특성상 다른 과 의사들은 진료기록부조차 보기 힘든 special part입니다. 그래서 동생은 수술 후에도 안과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충실히 따랐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영화도, TV드라마도 보지 않고, 병원근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으며,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당근 주스를 갈아 만들어 주셨고,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 안압이 올라갈까봐 뒤로 고개를 젖혀서 동생머리를 감겨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기를 한 달째까지도 눈이 좋아지기는커녕 일상생활을 하기도 힘들어지는 자신을 발견한 동생은(죽기 전 본인이 직접 친필로 작성한 진술서에도 쓰여 있습니다.) 2~3일에 한 번씩 ㅇㅇ안과를 찾아가게 됩니다. 본인이 직접 원장에게 눈물샘 막는 시술도 부탁해서 해 보고, 주머니마다 인공눈물을 가지고 다니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넣어도 보고, 자다가도 깨어나 몇 번씩 인공눈물을 넣기도 하는 불안한 시간들을 보내며 몸무게도 4~5kg이 빠졌습니다. 같은 의사로서 너무 자주 찾아가 자신의 상태를 묻는 것이 미안한 동생은 케잌까지 사 들고 가서 본인의 상태를 설명하고 수술 전에 확신했던 결과가 언제쯤 될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런데 조 모 원장은 오히려 동생을 피하고,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보게 하는 등 믿음으로 시작한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깨뜨리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동생은 자신의 눈을 수술한 의사는 만나지도 못하고 다른 의사를 통해 막연히 2~3개월 있으면 좋아질 거라는 얘기만 듣게 되었습니다. 수술 전에는 1개월이라던 약간의 불편함이 2~3개월로 말이 바뀐 것입니다.
동생은 의사입니다. 환자에게 1개월의 시간과 2개월의 시간이 결코 같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 동생에게 마냥 기다리기만 하라는 의사의 말은 무언가 불안함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만약 이대로 눈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어린 아이들을 진료해야 하는 동생이 자신의 작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지난 시간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동생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어렵게 조 모 원장과 연락하여 직접 대면을 하게 됩니다. 그 날이 1월 23일입니다. 동생은 그 동안 조 모 원장에 대한 신뢰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수술 후 그의 태도에 대해 다소 서운함을 내비치게 됩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조 모 원장은 자신이 수술을 잘못했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 거냐고 했더니, (이 내용은 동생이 죽기 전 직접 진술한 말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조 모 원장은 “당신 눈은 현재 재수술도 불가능해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 6개월 정도 지나면 간혹 좋아질 수도 있으니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라는 결정적인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날 이후 종달새처럼 조잘거리던 동생은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만약 수술 전 부작용에 대해서 듣기라도 했다면 그 정도로 낙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술 전에는 그리도 장담하던 조 모 원장이 수술 후 보여준 태도와 언행은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수술만 했으면 그만일 뿐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니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는 것은 의사로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사형선고와도 같은 의사의 말로 인해 동생은 결국 최후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동생의 꿈은 어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계셨기에 그 힘든 의대 공부도 버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동생은 사람을 돈으로 보지 않는 진정한, 사람을 위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의사를 할 수도, 사랑하는 부모님을 볼 수도 없게 된다면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사건 이틀 후, 1월 30일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조 모 원장은 그 동안 동생을 진료한 진료기록부 카피본과 원장 자신의 입장을 기록한 자료를 병원에 보냈습니다. 내용의 골자는 자신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간이 굳어가고 신장이 망가지고 폐포가 터져 숨을 헐떡거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동생에게 배달된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내용의 조 모 원장의 자료를본 동생은 죽어가면서도 억울함을 억누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숨조차 쉬기 힘든 그 상황에서 자신이 왜 죽음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고, 반드시 조 모 원장의 잘못을 밝혀 달라는 호소를 하게 됩니다. 의사로서 수술 후 부작용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상대 의사의 말만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만 탓하던 동생이, 지난 날 본인의 실수로 수술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고도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을 하는 조 모 원장의 행동을 보고 억울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기 잘못이라 생각하며 혼자서 짐을 지려던 동생은 죽기 전 직접 진술서를 작성하기까지 하였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동생이 고통 받고 있는 동안 그 분들은 자신의 잘못을 덮을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1월 31일 아침 동생은 서서히 의식을 잃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기 몇 시간 전 우리의 요청으로 동생을 보러 온 조 모 원장은 자기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고 여러 친지와 친척들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하고 자리를 급히 떠나버렸습니다. 그 날 저녁 8시 30분에 동생은 끝내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우리 유가족들은 하고 싶은 말과 궁금한 게 너무 많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인술이라고도 하는 아주 특수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직업입니다. 의사라면 한 환자가 수술하고 퇴원하고 향후 발생되는 문제점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의료사고라고 보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수술 전 충분한 설명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환자는 본인이 수술 후 느끼게 될 아주 소소한 불편함까지 설명을 듣고 알 권리가 있습니다. 수술 전에 1개월이던 시력회복 기간이 어떻게 2~3개월에서, 6개월까지 바뀔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부작용은 halo(빛 번짐) 현상만 있다고 듣고 수술했는데 느끼는 부작용은 수십가지이니 어떻게 배신감이 들지 않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둘째는 동생이 과연 라식수술에 적합한 환자였는지 하는 것입니다. 차트 상으로 보면 라식수술에 적합하지 않은 눈은 아니지만 안구 건조증이 심했습니다. 안구 건조증이 있어도 수술 가능하다고 하는데 수술하기 전에 본인에게 안구 건조증이 있는지 물어보았거나 혹은 안구건조증이 있으면 좋아지는 속도가 느릴 수 있다는 설명을 했을까요?

셋째는 수술 전 동공크기와 수술 후 동공크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동공크기가 크면 수술도 더 신중히 해야 한다는 데 수술 후 동공크기는 수술 전보다 많이 차이가 났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동공크기를 잘못 잰 건 아닐까요?

넷째는 동생이 마지막으로 조 모 원장을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는 앞으로 재수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는데 이제서 원장이 주장하는 바로는 재수술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고 주장합니다. 라식은 각막을 깎는 수술인데 동생 각막을 어느 정도 깎았는지 거의 남길 수 있는 최소한만 남기고 깎았으면 다시 재수술은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식기계에 동생의 기록이 입력되어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입력되면 삭제가 불가능하고 삭제되어 있다면 증거인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계에 입력된 기록으로 누구 말이 맞는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경찰에서 이 사건을 조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료기록부를 의사 협회로 보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검찰 측에서 조사하라는 공문이 떨어지면 병원 쪽에 진료기록부는 당연히 경찰 측에서 직접 가서 카피해오거나 가져오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안과 쪽에 직접 카피본을 내라고 했더군요. 우리가 동생 병원 쪽 진료기록부를 카피해서 가져다 드리면서 그 쪽 병원에서 가져온 기록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우리에게 보낸 진료기록부보다 3장이 부족하더군요. 그것도 동공크기가 다른 부분에서 말입니다. 그럼 부족한 3장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우리 가족을 마치 죄인 다루듯이 하면서 이 사건은 다 끝나 버린 사건이니 형사사건으로는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다른 쪽으로 하실려면 하시라고 설명하더군요.
진료기록부 장수가 부족한 걸 발견하고 (우리가 직접) 수사방식을 따지고 들자 그 때서야 사과를 하고 우리가 원하는 요구를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의 진술서를 받는다든지 다시 진료기록부 제출을 안과 측에 요구한다는 등의 일 말이죠. 그런 분들이 진료기록부를 의사협회로 보냈을 때 제대로 보냈는지가 저희들은 불안합니다. (동생의 진술서 첨부가 꼭 필요합니다.)
동생은 부작용을 그토록 많이 느꼈는데 과연 수술이 잘 되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안과 측의 주장이 맞는 얘기일지요. 너무 화가 나서 찾아간 가족들에게 조 모 원장은 “경찰 불러!” 하고 응대했으며 마치 우리들을 보상금을 노리는 파렴치한으로 몰면서 좋게 해결하고 싶다고 우리 가족을 불러 놓고는 “우리는 잘못없다” “억울하다” “지식인인 줄 알았더니 일반인들과 똑같다” “미안하게 생각했던 우리의 마음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한번만 더 병원에 찾아오면 조치를 취하겠다”며 우리를 협박하고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더군요.

요즘 라식 붐이 일어나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좀 더 편안하고 나은 삶을 위하여 수술을 택하고 있습니다. 라식이 꼭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본인의 상태를 충분히 알고 설명을 충분히 듣고 라식을 한다면 뒤따르는 부작용이 있어도 정말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의사와 함께라는 생각이 든다면 동생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유가족의 뜻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동생의 심정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환자를 돈으로 밖에 보지 않는 의사들에게 경고하고 싶습니다.
동생이 죽기 전 중얼거린 두 마디 말이 있습니다.
“그러게 처음에 신경을 썼어야지.”
“환자를 돈으로 보면 안 되지...”
우리는 동생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란 걸 밝히고 싶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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